창백한 푸른 눈의 음률
비가 세차게 오는 영화관 앞, 한 여자가 홀로 영화관 입구 앞에 섭니다. 이어서 또다른 상영관에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옵니다. 다들 비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연인은 남자의 자켓을 우산삼아 뛰어가고, 남자는 가방을 머리에 쓰고 뛰어갑니다. 여자 역시 다른 방법이 없어 뛰어나갑니다.
라디오에서 오프닝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비 오는 밤의 라디오 선곡은 무려 20분짜리 음악입니다. 다음 날 선곡으로 프로그램 하나가 윗분에게 눈치를 받습니다. 개편 때 없어진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지만 라디오PD인 동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그러던 중 어떤 소포를 하나 받게 됩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LP판입니다. 포장지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동현은 옛사랑이었던 그녀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수현은 어떤 남자와 우연히 만납니다. 일상적인 대화도 하고 장난도 치고 즐거운 분위기가 오고 갑니다. 하지만 남자의 진짜 목적은 연인이자 수현의 친구인 희진입니다. 희진의 연인은 착하고 자신에게도 신경 써 주지만, 기본적으로 연인에게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어 슬쩍 나간 희진은 라디오를 들으며 심야 드라이브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됩니다. 홈쇼핑 상담원으로 일하면서 사랑에 힘들어하는 고객의 전화를 끊지 못하고 취직기념으로 강릉과 놀러간 친구의 애인 사서함만 반복해서 듣는 수현은 쓸쓸함을 느낍니다. 수현은 문득 사고 당시 들었던 라디오 속 노래를 인터넷 통신을 통해 라디오로 신청합니다.
미련과 외로움이 맺어주는 인연
라디오PD인 동현은 신청곡이 들어온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동요합니다. 본인이 신곡한 노래는 옛사랑 영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현은 신청자의 통신 ID를 받아서 직접 해당 신청자에게 1:1 채팅을 걸어 물어봅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신청자가 친구의 ID를 빌려 쓴다는 걸 알게 되었고, 친구가 자신의 옛사랑의 이름과 같은지 물어봅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동현에게 맞장구를 치고 만나고 싶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친구에게 물어보겠다는 말을 해버립니다. 며칠 후 채근하는 동현 때문에 수현은 거짓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할까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만 결국 거짓말을 했다는 걸 고백합니다.
동현은 속은 사실에 분노하고 감정은 더욱 더 어두운 쓸쓸함으로 떨어집니다. 홧김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직장 동료에게도 가보지만 그 마음이 메워지지 않습니다. 수현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 애인에게 아주 잠깐 설레는 순간을 맞지만 결국 알게 된 것은 친구 애인이 친구에게 청혼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다.
수현은 자신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동현에게 인터넷 쪽지를 보냅니다. 하지만 동현은 쪽지를 삭제합니다. 그러나 며칠 후 수현은 우편을 통해 동현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게 되고, 둘은 다시 인터넷 채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쭉 채팅으로 대화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1997년의 인터넷 채팅을 소재로 한 영화
'접속'은 당시 PC통신을 통해 웹서핑을 하던 인터넷 초창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주연은 한석규 님과 전도연 님으로,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배우들입니다. 특히 전도연 님은 현재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에서 열연 중이시고, 차기작으로는 넷플릭스에서는 3월 31일 '길복순'이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두 분 다 워낙에 멜로에 최적인 눈빛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당시에도 엄청난 흥행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 소재인 인터넷 채팅에 대해서는 당시 말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PC통신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많이 자아낸 반면,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시큰둥했다는 평이 있기도 했습니다. 감독님의 코멘터리에 의하면 당시의 신세대들을 고려해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 PC통신을 하려면 모뎀을 전화에 연결해야 해서, 사용 시간만큼 전화요금이 나가는 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요금폭탄이 쉽게 생성되는 시대였고요. 또한 연결하는 순간 모뎀 특유의 작동하는 소음이 굉장히 컸습니다. 밤 중에 몰래 하기가 불가능했지요.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여유있게 인터넷을 하는 주인공들이 은근히 유복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킬포였습니다. 저의 경우, 회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가장 뜸한 오후 시간대에 몰래 전화선에 연결해서 1시간 정도 인터넷을 한 기억이 나네요.
상업정 흥행 외에도 이 영화는 대종상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최우수 작품상, 신인감독상, 조명상, 편집상, 각색상, 남자인기상, 신인여우상을 휩쓸어 버린 셈입니다. 이 영화로 제작자, 감독, 배우 모두 큰 주목을 받고 성공하였습니다.
올드 팝송이 녹아든 영화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풋풋한 사랑 외에도 유명한 올드 팝송이 삽입된 것이 특징입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음악은 사라 본(Sarah Vaughan)의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to) 로 중간중간 배경음은 물론 엔딩으로도 쓰였습니다. 이 때 당시 방송국에서 이 노래를 많이 활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도 결혼식에서 간간히 쓰이기도 합니다.
A Lover's Concerto가 주인공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희망적인 분위기를 표현한다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팝송은 벨벳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의 페일 블루 아이즈(Pale Blue Eyes) 입니다. 본래 Velvet Underground 밴드가 활동 당시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는 역사상 위대한 밴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활동할 때 그들의 음악을 많은 사람이 샀던 것은 아니지만 샀던 사람은 그 영향으로 음악을 시작했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의 뒤에는 앤디 워홀의 서포트가 있었는데, 많이 알려져있는 바나나 그림의 디자인이 이들의 음반 중 하나인 The Velvet Underground and Nico 입니다.
이 영화에서 또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올드 팝이 있습니다.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의 더 룩 오브 러브(The Look of Love)입니다. 도입부를 듣는 순간 '아 이 음악'이라고 무릎을 탁 칠 법한 이 음악은 여주인공의 일상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서로 채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서로의 생활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경쾌한 올드팝으로 표현합니다. 둘은 점점 소통해가면서 마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곧 서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게도 하지요.여기 나오는 음악은 더 트로그(The Troggs)의 위드 어 걸 라이크 유(With a Girl Like You) 입니다.
지금 시대의 만남 어플이나 랜덤 채팅에 비하면 정말이지 수수하기 그지 없는 멜로 영화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어 가는 시대상을 비춰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오락 영화이자 멜로 영화가 시대가 20여년이 넘은 지금은 오히려 시대적 사료로 느껴지기도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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